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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춘천에서의 60년대 추억
    글과 함께 춤을/산문놀이 2013. 1. 24. 04:36


    요즘 춘천고속도로가 뚫리면서 많은 변화가 보이고 있다. 농사만을 고집하는 분들은 땅값이 오르자 그 곳 땅을 팔아서 땅값이 저렴한 곳으로 이주하기도 했다. 관광객이 몰려가기도 한다.
    강원도, 춘천 이 곳에서의 추억은 60년대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 간다. 고등학교 시절 서울에서 놀러 온 서울 촌놈들을 정겹게 맞아주던 정명이, 중근이, 영남이 등 춘천 토박이 악동들의 모습이 지금도 물안개 처럼 피어오르면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진다. 당시 중도에는 수박농사가 한창이었고 가을에는 단무지 담그는 긴 무 농사가 온 섬을 덮었다.
    여름방학 어느날 지금의 어린이 공원 근처쯤일까에서 야영을 하다 어느 악동의 제의에 따라 군함(?) 한척을 빌려 섬으로 상륙해 수박서리에 나선 일이 있었다. 침투간첩처럼 살금살금 다가서 수박을 두통씩 옆구리에 꿰차고 철수 할 무렵 우리의 어설픈 침투조는 노출되고 말았다.

    부리나케 배로 철수를 서둘렀다. 그러나 그와중에서도 누구 하나 수박을 버리고 온 사람은 없었다. 부지런히 노를 저었다. 그때 동네 아저씨들도 우리보다 빠른 쾌속선으로 추격하기 시작했다. 너무나 빨랐다. 아저씨들이 빨랐다기 보다 우리가 인원 초과로 느렸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그 때 어느 한 악동이 소곤댔다. 수박을 모두 물에 버리고 오리발을 내밀자고. 드디어 오리발 작전이 소리없이 진행돼 따왔던 수박은 소리 안나게 물로 던져졌다. 그 사이 아저씨들의 뱃머리가 연평해전에서 이북배 몰아치듯 우리배를 기세좋게 몰아붙였다.
    이놈들 감히 어디에서 수박서리냐고 불호령이 떨어졌다. 번죽 좋은 누구더라 그가 두손을 벌리는 제스쳐와 함께 그런 일 없는데요 했다. 밤이건만 아저씨의 어이없어 하는 표정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잠시후 그의 손이 달빛의 춘천호반을 조용히 가리켰다. 모두의 시선이 물위로 모아졌는데 모두가 입을 다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곳에는 우리가 도망온 궤적을 따라 수박이 줄줄이 동동동 떠있었던 것이다. 증거인멸이 실패로 돌아감과 동시에 아무 말도 못하고 꼼짝없는 포로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 이후는 겁이나서 기억도 제대로 안난다. 다만 학생증을 맡기고 빌고 해서 풀려나 야영지로 돌아왔다는 사실과 학생증을 어떻게 돌려 받을 것인가를 놓고 밤새도록 머리를 맞대고 숙의 했던 생각 뿐이다.
    결론은 아저씨들이 좋아할 술과 안주를 사가지고 가서 모두가 또다시 빌자는 것이었다. 춘천 중앙시장에 가서 됫병 소주와 돼지고기를 준비했다. 그 시절 사죄의 표시로는 성의껏 괜찮은 편이었으나 그래도 마음 한구석은 무겁기만 했다. 아저씨들이 학교로 알리면 정학 아니면 퇴학 등등으로 걱정이 태산이었다. 그러나 그 것은 기우였다. 마을로 들어서는데 아저씨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학생들이 돈도 없으면서 이러면 되느냐, 우리도 한시절 그런 일이 있었다는 등 괜찮다며 용서를 해주었다. 그리고 언제 건져왔는지 전날 우리들이 증거인멸을 위해 몰래 버렸던 수박까지 배에 실어주었다. 한사람이 두통씩 땄으니까 합이 열두통이었다. 수박으로 배채우기는 난생 처음이었다. 춘천의 인심은 그 때도 후했다.
    이밖에도 호반 가운데서 깊은 물인줄 알고 뛰어들었는데 진흙뻘 속으로 머리를 처박았던 일, 인적이 드믄 등선폭포에서 발가벗고 목욕하던 일, 봉의산을 하도 더워 팬티바람으로 올라 갔던 일 등등. 또 있다. 군시절 북배산에 작전 나왔다 그 시절의 추억이 그리워 춘천으로 조용히 침투하여 닭갈비에 소주 한잔하고 소리소문 없이 귀신처럼 복귀했던 일, 결혼 전 강촌을 지나 홍천강가에서 야영하며 집사람과 나눴던 달콤했던 밀어는 어떻고, 또 어느핸가 늦가을 붕어섬에서 밤새도록 덜덜 떨면서 집사람과 낚시 하던 일 등. 
    춘천은 결코 뗄래야 뗄 수 없는 강한 흡착력으로 다가서고 있다. 우리 가족 모두의 진한 추억이 깃든 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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