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읽지 않고 보기만 해도 마음이 편해지는
빛바랜 책이 한 권 있다.
72년에 구입한 40살먹은 "소월시집"이다.
그분의 시라면 덧붙일 또 다른 어떤 말이 필요할까?
고달프다 싶으면 꺼내들고 읽고 또 읽으며
그 분의 울타리로 뛰어들곤 한다.
그런데 오늘은 새로운 詩集이 손에 들려 있다.
친구가 술잔 대신 권해준 책이다.
문패가 "그때 술을 마시지 않았더라면"이라고 걸려 있다.
알콜중독 치료를 받기도 했던 허근 신부가 쓴 시집이다.
"지금은 이유도 없이"란 그의 시를 옮겨본다.
나는 술을 좋아해서
작디작은 잔으로 시작했지만
나이를 더함에 술잔은
큰 잔으로 바뀌어 있고
괴로움과 슬픔을 달래려
약한 술로 목을 축였지만
지금은 이유도 없이
그냥 입에다 퍼붓고 있네
그동안 숱하게 읽어온 술권하는 시와는 딴 맛이다.
허 신부는 "마지막 술잔을 기울리며"
"술잔이 있던 자리에 주님을 모시고"살겠노라고 했다.
담배도 안 피우는데 술까지 하며 미련을 떨구지 못했던 술잔-.
이를 멀리 했을 때
나 또한 친구에게 술 대신 이 시집을 권해볼 참이다.